
트로트가 내 인생의 시간을 깨우는 순간들 — 체험으로 풀어본 ‘인생노래’의 힘
“이 노래만 들으면 그때 생각이 나요.”
어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묵직하게 저려오는 경험, 저 역시 그런 순간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몇 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하루하루가 유난히 무겁던 시기,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시장 골목을 지나고 있었죠. 축축하게 젖은 비닐 천막,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 냄새, 그리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낡은 스피커의 노랫소리.
“비 내리는 호남선~”
그 한 소절이 제 발걸음을 멈춰 세웠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스쳐 지나갔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가사가 제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노점상 아주머니는 저를 보며 “이 노래 들으면 마음이 좀 편해져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트로트를 들을 때마다 ‘음악이 사람의 시간을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인생노래는 우연한 순간에 시작된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는 낡은 카세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술 한잔 하신 날이면 늘 같은 테이프를 꺼내 ‘남행열차’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셨죠. 저는 그때마다 왜 그 노래에 그렇게 진심을 담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서른을 넘긴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어쩌다 그 노래를 부르게 됐습니다. 가볍게 부르려던 노래였는데 이상하게 가사가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 노래에 마음을 실었는지, 그 구슬픈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날 이후 ‘남행열차’는 제게도 특별한 인생노래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곡이 아니라, 잊고 있던 아버지의 마음과 제 시간을 연결해주는 끈이 되어버렸죠.
세대를 잇는 감정의 다리
얼마 전에는 우연히 집에서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오자 엄마가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노래가 나올 때면 친구들과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누며 꿈을 이야기하던 시절이 떠오른다며, 오랜만에 소녀처럼 웃으시더군요. 그런데 그날 저녁, 집에 놀러 온 조카가 그 노래의 리메이크 버전을 휴대폰으로 틀어놓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세 세대가 같은 노래를 다른 기억으로 공유하는 순간. 그걸 보며 느꼈습니다. 트로트는 단순히 유행을 넘어 세대 간 정서적 유산을 남기는 음악이라는 것을.
노래방에서 마주한 누군가의 인생
제가 실제로 겪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어느 회식 자리에서였습니다. 평소 농담을 좋아하고 분위기를 띄우는 데 능했던 선배가, 갑자기 조용한 트로트 한 곡을 신청했습니다. ‘비 내리는 고모령’. 마이크를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은 채 한 구절 한 구절 감정을 눌러 담듯 부르는데, 그 모습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선배는 말했습니다.
“이 노래만 들으면…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노래’는 이렇게 하나의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듣는 이들까지 자신의 삶을 떠올리게 만들죠. 트로트는 그 사람의 사연을 몰라도, 노래 자체가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삶을 버티게 하는 위로의 선율
저도 힘들었던 시기에 우연히 들은 ‘천년바위’가 큰 힘이 되어준 적이 있습니다. “변치 않는다”는 단순한 가사가 그때는 참 묵직하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좌절할 때는 ‘막걸리 한잔’이 위로가 되었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할 때는 ‘내 나이가 어때서’가 괜히 용기를 주기도 했죠.
트로트는 화려한 말로 위로하지 않습니다.
그저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지” 하고 등을 토닥여주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인생의 굴곡을 겪을수록 트로트는 더 따뜻하게 우리의 삶에 스며듭니다.
노래 속에 살아있는 나의 시간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기사님이 조용히 ‘홍시’를 틀어놓았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따뜻한 홍시가 떠올랐습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그 맛, 그 손의 온기까지도. 단지 노래 한 곡이었지만, 저는 그 순간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로트의 ‘시간 소환 능력’입니다.
한 곡의 선율이 우리의 기억을 깨우고, 오래된 감정을 다시 살아 숨 쉬게 합니다.
영원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인생노래
트로트가 인생노래가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노래는 변하지 않는데, 우리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20대에 들었던 트로트가 40대가 돼서 들으면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오고, 부모가 되고 나서 들으면 그제야 이해되는 가사가 있습니다. 같은 노래라도 인생의 국면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트로트는 유행을 넘어, 삶의 동반자로 남는 음악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노래는 무엇인가요?
오랜만에 그 노래를 다시 들어보세요.
아마도 그 안에서 오래전의 ‘나’와 오늘의 ‘나’가 조용히 마주 앉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만의 인생노래가 또 다른 의미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by.창밖문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