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실

라디오와 트로트, 소리로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시간

창밖문지기 2025. 11. 5. 14:15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진심 — 라디오와 트로트가 내 일상에 건네는 위로

라디오를 켜는 순간, 우리는 화면도, 얼굴도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연결됩니다. 전파를 타고 흘러오는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늘 신기합니다. 저는 지금도 라디오의 ‘보이지 않는 온기’가 주는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겨울 새벽, 출근길 버스 안에서 처음 들었던 트로트 한 곡은 제 하루뿐 아니라 제 마음 한 조각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주었죠.

당시 저는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 조금 지쳐 있었습니다. 버스 창밖으로는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거리와 졸린 가로등 불빛이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묵묵히 하루를 견딜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때 라디오에서 DJ가 잔잔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일터로 향하시는 분들, 오늘도 수고 많으십니다. 이 노래로 마음 조금 덜 무거우셨으면 해요.”

이어 흘러나온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 순간 버스 안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창밖에 비친 제 얼굴은 피곤했지만, 노래 한 소절이 가슴을 건드리자 이유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저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같은 곡을 듣고 같은 마음을 느끼는 묘한 동질감 속에 잠시 몸을 기대었습니다. 그날 이후, 라디오는 제게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진심’이 되어버렸습니다.

상상력이 빚어내는 무대

라디오의 특별함은 화면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듣는 데 더 집중하게 되고, 들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냅니다. 노래 속 배경, 가수의 표정, 그 가사에 담긴 사연…. 저는 트로트를 들을 때마다 제 마음속에서 나만의 무대가 생겨나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느 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라디오를 켜놓았는데, ‘홍시’가 흘러나오자 저는 눈앞에 외할머니가 앉아 계신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겨울이면 꼭 챙겨주시던 차갑지만 달콤한 홍시의 질감, 주름진 손등, 부드럽게 담담한 목소리까지도 떠올랐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감정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경험이었죠.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어지는 연결

라디오와 트로트의 역사는 저희 가족의 기억에도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텔레비전이 흔치 않던 시절, 부모님은 저녁이면 라디오를 가운데 두고 조용히 음악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때 흘러나오던 트로트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루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마음을 나누는 창구였다고 하더군요.

저는 최근까지도 늦은 밤 심야 라디오를 자주 듣습니다. 그 시간대의 트로트에는 묘한 힘이 있는데, 외롭고 고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주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택시 기사님, 편의점 야간 근무자, 잠 못 이루는 청취자들….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같은 노래를 들으며 잠시 하나가 되는 경험. 라디오는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합니다.

DJ와 청취자가 만들어내는 공감의 삼각관계

어느 날, 라디오에서 한 청취자의 사연이 읽혔습니다. “아버지가 오늘 병원에서 힘든 소견을 들으셨습니다. 마음 추스르기 어려워 트로트를 같이 듣고 싶어요.” DJ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 마음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 노래가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천년바위’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저는 사연 속의 청취자도, DJ도, 그 노래도 모두 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노래가 무언가를 단단히 버티게 해주는 그런 경험이었죠.

아날로그 감성이 만들어내는 깊이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노래를 검색해 들을 수 있는 시대지만,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는 트로트 한 곡은 전혀 다른 감동을 줍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 찾아오는 ‘선물’ 같은 음악이라고 할까요. 때로는 약한 주파수 잡음까지도 그 순간을 더 특별하게 만듭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인간적인, 그래서 마음이 더 가는 소리.

일상 속 작은 위로의 시간

아침 준비를 하며 들려오는 경쾌한 트로트는 하루를 깨우는 알람이 되기도 하고, 퇴근길 차 안에서 만난 애잔한 트로트는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노래는 마음속에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는 조용한 응원을 남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응원을 들으며 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선율

라디오와 트로트는 결국 ‘소리로 이어지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심, 멀리 있어도 함께 듣는 노래가 만들어내는 위로. 우리는 그 속에서 작은 공동체가 되어 서로의 하루를 함께 견디게 됩니다.

오늘, 라디오를 켜고 트로트 한 곡을 들어보세요.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분명히 말할 겁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보이지 않지만 더 진하게 전해지는 그 위로를 여러분도 꼭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by.창밖문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