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 저녁, 손끝이 시릴 만큼 바람이 차던 날이었습니다. 장을 보려고 동네 시장을 걷던 중, 한 구석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비 내리는 호남선’. 노점상 아주머니가 손님도 없이 앉아 작은 스피커로 틀어놓은 음악이었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아주머니는 “요즘은 이 노래라도 들어야 덜 추워요”라며 웃어 보였고,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도 얼어 있던 무언가가 조금 녹아내렸습니다.

잠시 뒤 눈치도 없이 흥얼거리던 제 코러스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슬며시 하나둘 멈춰 섰습니다. 어떤 청년은 장바구니를 손에 든 채 리듬을 타고, 마스크를 눌러쓴 한 어르신은 조용히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이름도, 사는 집도, 사연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같은 감정 속에 있었죠. 추위로 움츠렸던 어깨가 자연스레 펴지고, 각자의 눈빛 사이에 따뜻한 공감의 온기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트로트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라는 사실을.
트로트의 힘은 ‘보편적 정서의 공유’에서 시작됩니다. 이별의 아픔, 고향에 대한 그리움, 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서민의 애환…. 이런 감정들은 나이와 세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대학생 시절, 저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사랑의 콜센타’를 들으며 괜히 센치해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저희 아버지도 같은 노래를 들으며 “옛날 생각난다”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계셨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전혀 다른 세대였지만, 그 노래가 건드린 감정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죠.
요즘 사회는 점점 개인화되고, 세대 간 거리는 더 벌어지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트로트 앞에서는 그 벽이 쉽게 무너집니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는 ‘남행열차’를 부르고, 신입은 옆에서 박자를 맞춥니다. 경로당에서는 할머니와 손녀가 ‘꽃타령’을 주거니 받거니 부르며 깔깔대고요. 노래 몇 소절만 흘러도 서로가 잠시 같은 자리, 같은 감정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마치 잃어버린 아날로그 정서가 잠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요.
특히 코로나19 시기, 저는 트로트의 ‘위로의 힘’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없던 어느 날, TV에서 우연히 ‘미스터트롯’ 무대를 보게 됐습니다. 생전 관심 없던 장르였는데, 그날따라 가수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죠. 그리고 다음 날이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무대를 보고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어제 너무 답답했는데 눈물 나더라”고, 또 다른 이는 “오랜만에 웃었다”고 적어두었더군요. 만나지 않아도, 손을 잡지 않아도 음악 하나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트로트는 또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해줍니다. 시장에서, 버스 안에서, 작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속에는 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막걸리 한잔’의 구수한 가락을 들으면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던 우리 부모님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면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트로트는 화려한 무대 위 음악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서민의 기록이자 마음의 언어입니다.
지역 축제에서 본 장면도 잊히지 않습니다. 무대에서 트로트가 흐르자마자 어색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습니다. 처음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앞으로 모이고, 어르신 한 분이 조심스레 박수를 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모두가 한 목소리로 떼창을 하고 있었죠.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게 바로 트로트가 만든 연대구나.’
트로트가 주는 위로가 사회적 연대로 확장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트로트는 우리 각자가 가진 상처와 희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어느 겨울날 시장에서 들었던 그 트로트 한 곡처럼, 음악은 사소한 순간에도 사람들을 가까워지게 만들고,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를 좁혀줍니다.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트로트가 만들어내는 이 따뜻한 순간들이 쌓여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다정하고 단단한 곳으로 바꾸어가고 있다고.
오늘, 창밖에서 들려오는 트로트 한 소절에 잠시 귀 기울여보세요. 그 안에는 우리 모두의 삶이 조용히 흐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by.창밖문지기